여성중앙 3월호 2004
할리우드를 물들이는 색깔 있는 남자, 영화감독 강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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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줄도, 백그라운드도 없이 무조건 부딪히기, 그리고 기 죽지 않기.
독립영화 감독 ‘강영만식’ 할리우드 개척 전략이다.
군대제대후 결심한 미국 유학과 맨몸으로 시작한 할리우드 뚫기, 그 노력의 결실들이 크고 작은 영화제를 통해 돌아왔다.
충남 서산 시골에서 미국 할리우드까지. 그 길고도 예사롭지 않았던 강영만의 인생 다큐멘터리를 살짝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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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신성일 & 장미희의 영화를 만나다
“영만아~ 학교 가자~”
충남 서산하고도 팔봉면, 그러고도 호리의 한 구석. 카메라가 멀리서 마을의 전경을 훑고 영만이네 대문 앞에서 멈춘다. 여기가 바로 3대째 농사를 짓고 있는 영만이네다
“버스가 중학교 들어가서 들어왔기 때문에 초등학교는 무려 4km를 걸어서 다닐 정도로 깡촌이었죠. 전기도 없었다면 믿으시겠어요? 흑백 텔레비전이 들어올 때도 이장님댁에 겨우 1대가 있었을 정도였다니까요. 그것도 낮에 이장댁 밭일을 도와 드려야 저녁에 가서 볼 수 있었어요.(웃음)”
그랬던 ‘촌놈’이 지금은 세계 영화시장의 메카인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감독으로 변신했다. 영화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시골 아이 영만이가 움직이는 그림에 충격을 받았던 것은 초등학교 에 입학하던 8살 때다.
“TV에서 처음으로 만화영화를 본 거에요. ‘태권 V’ 말예요. 세상에 그림이 막 움직이는 거에요. 이장님댁에서 그걸 보고 집에 와서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때 그림에 대한 재능을 알게 됐죠.”
그때까지는 영화를 몰랐다. 그저 그림이 움직이는 것에 흠뻑 빠져 중학교 때부터는 아예 본격적으로 자신의 만화를 그렸다. 사극, 액션, 충효이야기 책의 스토리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각색도 해 가면서 말이다.
“제가 그린 만화는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그린다고 압수해서는 교무실에서 자기네들끼리 볼 정도로 재미가 있었나 봐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고등학교때 미대를 가겠다고 결심을 하고 서산시로 나가 미술학원을 다녔어요.”
움직이는 그림보다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영화’를 만난 것은 고3때다. 신성일과 장미희가 나오는 영화였는데 거의 ‘황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순수미술을 하면 배가 고플까봐 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그는, 그러나 홍익대 입시에서 보기좋게 낙방하고야 만다.
“참 이 얘기 하면 좀 챙피하긴 한데… 실기시험을 보러갔더니 주제가 ‘새와 전화기’더라구요. 구성을 하라고 하는데 나중에 그려논 그림이 서울 아이들하고 너무나 딴판인 거에요. 무선전화기에 버튼이 있는 전화기 대신 저는 손가락으로 다이얼 돌리는 이장님댁 전화기를 그렸으니 그게 어디 앞선 디자인으로 평가를 받았겠어요?”
뒤통수를 크게 한대 맞은 느낌. 말로만 듣던 ‘서울’은 그렇게 무서웠다. 시골 집에 비보를 알리고 그는 재수를 결심했다. 어디 서울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시험해 보고도 싶었다.
“서울에 덩그러니 혼자 상경했으니 돈도 없었죠. 유명학원을 찾아가서 청소할테니 학원 장학생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했죠. 몇군데 가서 말을 꺼냈는데 운 좋게 한군데서 받아줬고 학원비는 거의 안내고 그림만 그릴 수 있었죠. 1년 후에요? 학원에서 베스트로 홍대를 들어갔죠.”
우여곡절 끝에 시각디자인학과의86학번 새내기가 됐다. 그런데 힘들게 들어간 학교에서 그림보다는 엉뚱한 것에 미쳐버렸다. 보디빌딩. 지금 그를 보면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미스터 홍익’에까지 뽑힐 정도로 그는 제법 스타일 잡힌 보디빌더였다. 그러면서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지독한 팬이 됐다. 아널드를 보기 위해 열심히 보기 시작한 ‘영상’의 매력에 자연스럽게 끌겨가고 있던 시간들이다.
scene 2. 영화에 미친 뉴요커가 되다
그림그리는 남자, 보디빌더 강영만은 갑작스럽게 항로를 변경했다. 군대에서 남는 시간에 영어공부를 시작하면서 부터다.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이 다시 나면서 영화공부를 해 봐야겠다는 결심이 서더라구요. 93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고3 입시지도를 시작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어학공부를 탄탄히 한 것과 유학비 마련 이외에 별달리 준비한 것도 없었다. 영화니까 무조건 뉴욕이다라는 생각으로 뉴욕에 건너갔고 거기서 만난 영화인들에게 학교를 물어봤다. 어느 학교냐 하는 것보다는 무엇을 가르치는 곳인가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주변의 추천으로 들어간 곳이 더 뉴 스쿨(The New School). 자율스러운 분위기에 실습 위주의 교육이 아주 체질에 딱 맞았던 곳이다.
“운 좋게 장학금도 받고 교수님 TA(Teaching Assistant)을 했어요. 그게 바로 미국이 저를 붙든 이유이기도 해요. 뭐랄까… 도전에 대한 자신감이 섰다고 할까요. 졸업하고 난 뒤 무조건 굶더라도 할리우드로 가야겠단 생각에 LA로 왔어요. 근데 누가 한국인 강영만을 알아나 주나요? 한 1년간 로컬 광고도 만들고 하면서 수도 없이 레주메를 들고 영화사를 떠돌며 ‘제발 저 좀 써 주세요’ 광고를 시작했죠. 툇자 맞는 건 아주 이력이 났죠. 그러다 시작한 바닥일이 샌 피드로 부둣가에서 찍은 액션영화 ‘페이퍼 불렛(Paper Bullet)’ 이란 작품이었어요.”
일단 할리우드 입성 성공. 첫단추를 끼워놓았더니 다음 일거리들이 하나둘씩 생겼다. 영화 연출이 전공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그림’이라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 전 스토리 보드 작업과 애니메이션 작업 등으로 미국인들과 동참하면서 점점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는 유대인과 USC 동문, 그리고 게이(gay)라는 3대 메이저 세력에 의해 움직인다해도 과언이 아녜요. 저는 뭐 그 세가지에서 다 거리가 멀죠. 근데 뭐 툇자 맞으면서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즐길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도 인생도 기승전결이 있기 마련이다. 맨주먹으로 뛰어든 할리우드에서 강영만은 2000년 드디어 메가폰을 잡았다. 첫 작품인 ‘큐피트의 실수(Cupid’s Mistake)’가 2000년 에미상 아시안 어워드 후보작으로 올랐다. 이 영화는 제작비 980달러라는 최저예산으로 2003년판 기네스북에 기록되기도 했다. 돈 없이 처음 찍다보니 출연하는 배우를 최소화시키고 로케이션 촬영 퍼밋 없이 할 수 있는 ‘게릴라 필름메이킹’ 방법으로 제작했다. 로맨틱 코미디로 뉴욕 관객들을 꽤나 웃게 만들었다.
이후 만든 ‘퍼스트 테스트먼트(First Testament)’,’화장실 교육’ 다큐멘터리 ‘헤이티 섬의 아이들’ 등으로 ‘영맨’의 실력은 수차례 영화제 수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기억하는 영화는 아무래도 ‘비누아가씨(Soap Girl)’죠. 할리우드 마사지걸로 일하는 재미교포 여성이 숫총각 시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스토리에요. 인터넷 독립영화평론지에서 별 5개를 받기도 했죠.”
‘비누 아가씨’는 2002년도 빅 베어 레이크 국제영화제에서 베스트 필름 관객상을 차지하면서 극장에 개봉하기에 이른다.
지난해 한국을 찾았을 때 미국 방송과 가진 인터뷰 녹화 비디오 테입을 부모님께 선물로 드렸다.
“그래, 너라도 국제무대로 나가라.”
충남 서산에서 가방 하나 들고 상경했던 ‘촌놈’ 아들이 이젠 할리우드라는 ‘큰 물’에서 놀고있다.
scene 3. 존 카사베디스를 꿈꾸다
“요즘 한국영화보면 아이디어들이 참 좋아요. 근데 아쉬운 점이 한 장르가 인기를 모으면 모두가 그 조류만 탄다는 거에요. 소재들이 너무 한정돼 있지 않나 싶어요.”
‘상복’ 때문인지 요즘 디렉터 강영만을 만나려는 한국쪽 사람들이 많다. 한국과 미국 양 문화를 아는 감독으로 양국을 다니는 장시간 여행도 그에게는 그저 즐거운 시간이다. 일단 시작한 영화, 죽어도 할리우드에서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를 한 지 오래.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결코 잃지 않을 생각이다.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과 합작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또 미국이라는 배경으로 다양한 민족의 삶도 그려보면서 이민족이기 때문에 더욱 성공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영어 하다보면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나오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가가 더 중요한 거거든요. 영화의 주제처럼 말이죠.”
‘색깔이 뚜렷한 감독’. 평소의 모습은 수채화처럼 편안하지만 영화에 관한한 디렉터 강영만은 아집도 있고 색깔도 유지하고 싶다.
“결혼이요? 영화로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궤도에 오르면 하고 싶은데… 한 마흔쯤이 될 것 같아요. (웃음) 사실 이국적인 여자를 좋아하는데 결혼은 한국사람하고 해야하지 않겠어요?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 만드는 남자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죠. 외모요? 포스트파티에 함께 나갈 정도의 인물이면 충분하죠.”
이상형 여성은 영화만큼 똑 부러지게 연출이 안 되는 모양이다. 쑥스럽게 웃는 얼굴에서 여전히 ‘충남 서산’ 냄새가 나는 그는 한국인으로서 ‘우리의 색깔’을 영화에 녹여낼 것이 분명하다.
입력시간 :2004. 03. 02 17: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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